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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장

[쿠로스가오이] Deux hommes 9

 

 


KUROO x SUGAWARA x OIKAWA x SUGAWARA x KUROO

 

 

 

 

 쿠로오와 저녁을 함께 먹는 시간이 부쩍 늘었네, 라고 스가와라는 요즘 들어 생각했다. 어제만 해도 그와 영화까지 보고야 말았다. 물론 결론적으로 의미 있는 영화였지만, 아니 그와 벌써 그런 사이가 되었던가.

 스가와라는 가만히 제 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되뇌였다. 쿠로오, 쿠로오, 쿠로오란 사람.


 "오이카와는 바쁘대."
 "알아."
 "저녁은 어떻게 할래?"
 "쿠로오."
 "응?"
 "왜 그래?"


 어제만 해도 벌써 그런 패턴이었다. 당분간 어떤 연유로 바빠진 오이카와를 핑계로 쿠로오가 저런 식의 청유를 멋대로 지껄여대는 패턴.

 그래서 일단 스가와라는 그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기름진 요리를 먹고, 심심하면 근처의 공원을 산책하거나 서점에 들렀다. 여전히 쿠로오는 라이트노벨 같은 서적 이외에는 전혀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스가와라도 별로 그런 취향에는 상관하지 않았으므로.

 스가와라는 그런 것들을 회상하며 여전히 누운 채로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느리게 감았다 뜨는 것을 반복했다. 귓가로는 쿠로오의 카드의 마그네틱이 손상되는 소리로의 환청을 감상하며.


 "여자친구는 안 만나?"
 "갑자기 그런 것도 궁금해졌어?"
 "응."
 "그렇지. 아무래도."
 "왜?"
 "왜긴,"


 널 만나야 하니까.

 라고 말한 쿠로오의 얼굴이 예상 가능한 만큼의 가벼운 표정이 아니었으므로, 스가와라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결국엔 그도 동성애를 동경하는 어느 미친 이성애자 부류 밖에는 되지 못했던 것일까.

 스가와라는 그의 말 뒤로 차마 어떤 다른 말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으나, 쿠로오의 마지막 문장은 여전하게 그의 곁에서 맴돌았다.

 회피는 수단일 뿐,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문제에 맞서야 한다는 것. 그러한 사회적 통념의 방법론은 스가와라를 그저 괴롭게 만들 뿐이었다. 피하고 싶다, 학교에서 어떻게든 마주치게 될 모든 쿠로오를 피하고 싶다. 스가와라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꿈을 꾸었다.


 "눈이 와."
 "……."
 "첫눈이네, 스가와라."


 어찌 됐든 스가와라는 내내 생각해오던 대로, 아무렇지 않게 다음 날의 쿠로오를 마주했다. 가볍게 인사도 나누고 그제 보았던 영화에 대해 감상도 하는 식으로. 평소와 같은, 코스프레를 하며.

 오이카와는 여전히 바빴으므로 부실엔 조용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스가와라는 애써 그를 무시하며 책을 읽어댔다. 그동안 아주 무서운 기세로 중간 두께의 책을 두 권이나 해치웠으나, 실은 글을 쓴 작가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쿠로오."
 "눈이 많이 내리네."
 "나 남자는 안 좋아해."


 스가와라가 말했다. 남자는 안 좋아한다고.

 얼마나 우스운 광경이려나. 사회적 통념은 무너졌다. 그래서 통념은 통념일 뿐 결국 진리가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회피는 최후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가와라는 제 말을 곧장 후회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스가와라의 수치심과는 별개로 쿠로오는 전혀 웃질 않았다. 그는 그저 스가와라를 바라봤으며,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가와라."
 "……."


 그럼 여자는 좋아해? 너 말이야.

 그럼, 그런 당연한 말씀을. 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입을 떼어야 하는데, 스가와라는 도통 그런 말도 안 되는 흑백논리에 쉬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어떤 간단한 것은 너무나도 간단하기에 복잡하고야 마는 것처럼.


 "스가와라. 나는 있지,"
 "……."
 "감정이란게 경험적 사실로서 기반을 둔다고 생각하거든?"
 "……."
 "그렇다고 이런 내 생각을 강요하는 건 아냐. 그저 참고하라는 거지."


 네가 여자를 좋아해 본 적이 있는지. 그런 경험이 있는지. 있잖아 스가와라, 나는 사실 그런 것들이 궁금한 거거든.

 궤변이다. 쿠로오는 그저 그렇게 말을 지어낼 뿐이지. 하고 스가와라는 제 자신을 진정시켰지만 책을 덮은 손은 힘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엔 저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는 쿠로오를 그저 바라볼 뿐으로 그의 행동은 통제당할 수밖에.


 "쿠로오 이러지 마."
 "어떤 걸?"
 "나한테 이러지 말라고."


 여태껏 스가와라는 그런 것을 의식해오긴 했었다. 남들이 자신과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들. 확실히 이런 관계를 친구 사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밖에서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기에는 그다지 신경 쓰일 만큼의 사이는 아니구나. 안도했던 과거.

 그러나 감정의 판단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므로. 결국에 중요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는 걸 스가와라는 깨닫고야 말았다.


 "오이카와는 바쁠 거야. 당분간은."
 "……."
 "그러니까, 오이카와는 바쁘겠지."
 "알았어. 두 번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으니까."
 "응. 그래."


 오이카와의 공석. 비워진 것에 채워지는 등의 균형의 원리.

 감정은 본래 행동보다 더딘 법이지. 스가와라가 제 머리를 쓸어올리자, 쿠로오가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가만히 생각만으로 그 주위를 감도는 채로.


 "눈이,"
 "뭐."
 "오네."
 "그러네."


 오이카와는 바빴다. 그랬으므로 오래간만에 찾아온 제 친척의 그런 계절감상을 들어줄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누가 시간이 상대적이라고 했던가. 현재의 오이카와에게만큼은 그 시간이란 게 매우 절대적이었다. 아주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니까. 그래서 오이카와는 너무나 바빴다.


 "아침부터 말도 없이 찾아와줘서 고맙다 너."
 "학교 가기 전에 들렸을 뿐이야."
 "어련하시겠어."
 "호의니까."
 "그래."


 호의니까, 내가 너의 그런 표정을 읽을 이유는 없다.

 일어나자마자 형식상의 모든 매뉴얼을 텍스트로 옮긴 서류들을 정리하는데 시간을 모조리 보낸 오이카와였다. 그랬기에 그것들과 연관된 모든 일을 상상하는 데만 해도 충분히 버거웠던 그는 우시지마의 말 뒤로 단번에 얼굴을 구기고야 말았다.

 제 사정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이미 뉴스에서도 대서특필한 기삿거리이고, 그로 인해 집안 전체가 비상일 정도였으니까.

 그래. 그렇지만 뭐 제 일은 아니라는 거지.

 오이카와는 그쯤 되자 되려 자신의 현실감각이 의문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우시지마. 넌 진짜 어디 가서 성격감정 같은 것 좀 받아봐라."


 실은 너 공감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것 아냐?

 오이카와가 어떻게 비꼬든 말든 우시지마는 언제나 그렇듯 챙겨온 반찬거리들을 집구석 어딘가에 팽개쳐놓을 뿐이었다. 저를 향한 비난이나 조롱은 전혀 안 들린다는 듯한 태도로.

 반찬을 갖다 주어야 하니 오이카와의 집에 들르고, 눈이 오니 우산을 펼쳐 든다. 그리고 학교에 가야 하니 학교에 가고,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겠지. 그렇겠지. 우시지마 너는 그렇게 살아도 별로 상관없겠지. 하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우시지마는 자신의 삶을 검열받지는 않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연애를 하고, 더 좋아지면 결혼을 하겠지. 집안 사이의 관계는 그다지 상관도 없을 테고. 그렇게 당연한 인생을 우시지마는 연속적으로 살아가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오이카와. 항상 너는 나의 아들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의 말씀. 그것은 초기엔 경전처럼, 그다음엔 족쇄처럼, 그렇게 결국 낙인이 되고야 말았다.

 권리가 집중되면 권력으로 변모하는 법이다. 오이카와의 아버지는 통치하길 원했다. 통치. 권력을 획득하여 유지하며 행사하는 것들. 그는 절대 재계의 바운더리 안에서 만족할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서 이해관계라는 것이 발생했다. 흔들리는 보수정당의 위세와 신선한 정계 인물 간의 이해관계. 그러한 이유로의 정계진출. 이슈의 파동. 그리고 오이카와.


 "그러니까 우시지마."


 오이카와씨 집에서 제발 꺼져줘.

 어떤 것들은 어떤 것들을 절대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능력을 타고나기 마련이다. 선천적으로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그런 것들.

 어찌 됐든 우시지마의 아버지가 국회의원이 되는 일은 만에 하나라도 없을 것이다. 우시지마는 그렇게 평범하게 살다간 그렇게 죽고 말겠지. 그리고 그때까지 오이카와의 모든 환경적 영향 또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아주 높은 확률로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안 할 테지만.

 그래서 오이카와는 자신의 서류들을 정리했다. 아버지의 아들인 관계로. 피는 물보다 진한 관계로. 아버지의 착한 아들이 되어야만 하는 관계로. 그것들 때문에라도 오이카와는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