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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장

[쿠로스가오이] deux hommes 8

 

KUROO x SUGAWARA x OIKAWA x SUGAWARA x KUROO

 

 

 


 가을은 한 해가 지는 계절이니까, 자기 자신도 그렇게 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그렇게 남김없이 져버리고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이 돼서 새롭게 피어나면 좋겠다. 가만히 탁자에 엎드린 자세로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스가와라의 눈이 서서히 감겨들어 갔다.


 "스가."
 "……괜찮아요?"
 "책상 위에 유인물 먼저 나눠줄래? 오늘 낭독회는 누구지?"
 "괜찮냐고요, 선배."
 "나?"
 "……."
 "보면 몰라? 기분 좋아 보이잖아."


 낭독회가 있는 날이면, 그들의 기분은 극단을 오갔다. 때로는 흥분한 채로, 다른 때는 한없이 우울한 채로. 그들은 늘 그런 모양으로, 부실 구석에 처박힌 턴테이블에서 돌아가는 LP판의 음악을 작게 감상하곤 했다.

 낭독회의 주제는 자유로웠다. 어떤 작가의 작품에 관한 내용도 괜찮았고, 아니면 한 시대와 관련한 내용도 좋았다. 아니면 그저 자신이 감명 깊게 읽었던 책 한 권을 가져와 그중 한 챕터를 줄줄이 읽어도 상관은 없었다.

 스가와라는 그런데도 그런 자리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조금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그동안 지켜봤던 선배들의 낭독회는 깔끔하게 진행되었고, 그와 관련한 유인물 중 몇 장은 관련 칼럼에 실어도 될 만큼 군더더기 없었다.

 그런 선배들이니까. 스가와라는 그제 밤 몇 번이나 고쳤다가 쓰길 반복했던 자신의 유인물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별것도 아니니까 긴장할 필요 없어."
 "……그래도,"
 "정 그러면 너도 하나 할래?"


 싫습니다.

 스가와라가 회장이 내민 그것을 향해 고개를 젓자, 주변 부원 몇몇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물론 당연하게도 스가와라는 그것들이 전혀 재밌지 않았다.

 몇몇은 의자 위로 삐딱하게 앉아서 스가와라의 유인물을 읽었고, 다른 몇몇은 소파에 서로의 어깨를 기댄 채로 멍하게 스가와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회장. 회장은 어딘가 또렷하면서도 몽롱한 얼굴을 하고서 스가와라 바로 근처에 끌어다 앉아, 그런 그를 관망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음악은 쇼팽. 그러고 보니 회장은 쇼팽을 좋아했었나, 그것도 조금 광적이라 할 만큼.


 "……그것들을 당시에는 시간이 흐른 뒤 잔류 된 찌꺼기라 생각했다. 남은 것들. 버려진 것이리라. 하지만 나의 우유부단함으로 그것은,……."


 스가와라의 생애 첫 낭독회는 꽤 순조로웠다. 순풍을 만난 돛대처럼, 부원들에게 자신의 것을 전달했으며 그것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해 가능한 범위 내의 것들이었다.

 부원들은 모두 친절했으며 상냥했고, 마음이 열린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스가와라는 한때 그들 모두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 또한 스가와라를 그만큼 사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마크 트웨인, 헤밍웨이. 각자의 작가 취향은 달랐지만, 그들 안에서 서로의 작가를 비난하는 일은 없었다.

 존중의 이데올로기. 그것이 그 짧은 시대에 대한 스가와라의 감상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서재 한편에는 저릿한 냄새를 풍기는 약초가 자라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나의 우유부단함으로 그것은 첨삭되지 않은 문장이 되어 나를 그의 일상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끔 하였다."
 "……."
 "재밌네."
 "언제 왔어?"
 "별로 얼마 안 됐어."
 "……."


 꿈에서 깨어난 스가와라가 맨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익숙한 표지의 책을 들고 부실 한쪽에 서 있는 오이카와였다. 이제는 거의 완연한 가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와이셔츠인 차림인 그를 보며 스가와라는 조금 춥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을 했으나. 그에 비해 당사자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모습이었으므로 이내 그런 걱정거리를 접어두었다.


 "하루카 젠야."
 "……."
 "생소한 작가 이름인데. 신인이야?"
 "그럴걸."


 엎드려있던 자세를 고쳐 앉은 스가와라가 담담한 어조로 오이카와에게 대답했다. 왠지 잠이 들기 전보다 눈두덩의 살이 팽팽해진 기분을 느낀 스가와라였지만, 그에 관해서는 달리 생각을 않기로 했다. 그런 것들보다 중요한 것은 많을 테니까.

 스가와라의 대답에 자조적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던 오이카와가 근처에 있던 의자를 스가와라 맞은편으로 끌어다 털썩 앉았다. 여전히 신경 쓰이는 책은 손으로 받힌 채로.


 "좋아해?"
 "작가를?"
 "응."
 "아니."
 "응?"
 "사랑해."


 말은 오이카와를 향하고 있었더라도, 분명 스가와라의 시선만큼은 그 책의 표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이카와는 전혀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애초에 독점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떠한 것에 경쟁자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오롯이 그를 독차지하는 것. 아무튼, 그런 것이 미리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자유시장에서 독점대상은 자연스레 주변부의 시기, 질투를 받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것이 당연한 이치이자 원리이니까. 하고 오이카와의 자신의 감정을 합리화했다.

 무엇에 대한, 무엇에 의한 독점이려나. 그래, 언제나 무엇을 정의하기에 먼저 감정이 앞서는 법이지.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어 스가와라의 눈가를 매만졌다.


 "어쩐지 위로가 필요해 보이는 얼굴이네, 코우시?"
 "오이카와."
 "응."
 "슬픈 꿈을 꿨어."
 "그래 보여."
 "그런데, 영영 머물고 싶은 꿈이었어."
 "……."
 "그런 꿈을 꾼 적 있어, 오이카와?"
 "짜증 나."
 "응?"
 "네 그런 말투, 표정,"


 꼭 오이카와씨를 불청객으로 만드는 기분이거든.

 스가와라의 볼을 감싸고 있던 오이카와의 온기가 떨어져 나갔다. 문제의 책은 스가와라가 앉아있는 탁자에 가지런히 놓인 채로 일시적인 주인을 잃었고, 닫혀버린 문을 바라보던 스가와라는 참으로 오랜만에 주체적인 혼란을 겪었다.

 주체의 사건이었다. 바로 오이카와라는 객체의 쿠데타.

 나의 우유부단함으로 그것은 첨삭되지 않은 문장이 되어 나를 그의 일상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끔 하였다.

 하루카 젠야는 글로서 스가와라를 강요했다. 너는 어쩔 수 없이 나의 문장에 공감하는 삶을 살게 될 거야, 하고. 너는 그런 우유부단함으로 결국 몰락하고 말 거야, 하고.


 "최근 들어 통화 빈도가 잦네, 테츠로."
 "아, 어. 아무래도 자식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겠지."
 "애초에 일본으로 함께 들어오면 문제없잖아."
 "회장님 아직 비자 풀리려면 몇 개월 남았다나 봐."
 "하긴 그쪽도 만만찮게 일 처리에 잡음이 많은 편이니까."
 "그래, 내가 아버지였다면 진작 그쪽 일에 손 뗐을 텐데 말이지."


 아무래도 자본주의 시대니까, 돈이 좋잖아?

 부실이 있음에도, 종종 쿠로오와 오이카와는 과거 줄곧 들리곤 했던 학교서고를 찾았다. 책이 많은 곳 특유의 쾌쾌한 분위기와 먼지 냄새. 둘의 유일한 공통점은 바로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주로 선생들이 학생에게서 빼앗은 잡지나, 무협소설, 라이트노벨 등은 바로 이 서고를 종착지로 했기 때문에 가끔 그것들을 읽느라 수업시간이 임박해 교실에 도착한 적도 적지 않았다. 요즘에는 아예 그러지도 않을 만큼 서고가 찬밥신세를 당하는 것 같았지만.


 "전부터 생각했던건데, 걔는 애초에 정신상담을 받아보는 게 어때?"
 "오이카와, 너 회장님 만나본 적 없나?"
 "아니 알지. 그분 성격 고리타분한 것도 알고는 있는데,"
 "그렇게 비슷한 얘기 꺼냈다가 재떨이 맞고 앰뷸런스 탄 우리 쪽 변호사가 12명도 넘어. 그냥 그쪽 집안은 죄다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벌써 피곤하네. 그런 쓰레기는 그냥 뉴질랜드 같은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 처박아두면 좋을 텐데."
 "아냐 어떻게 보면 가까이 두고 감시하는 게 나을지도. 일본으로 귀국시키는 것도 회장님의 방침이었어."


 겨우 한 사람의 귀국을 앞두고 쿠로오의 로펌 전체가 비상사태였다. 이미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해 대책을 세우고, 저명한 관련 변호사를 초빙했으며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므로 그러한 사실은 철저히 기밀로 붙여지기까지 했다.

 그런 연유로 쿠로오는 드물게도 피곤한 모습으로 종종 하품까지 해댔고, 부실에서는 통 잠만 자는 탓에 스가와라가 걱정 아닌 걱정까지 할 정도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는 대답뿐. 하지만 그런 것과 다르게 쿠로오의 몸무게는 이 주 만에 2㎏이나 줄어든 상태였다.


 "이제 곧이야, 곧."


 가을이 지나면 그 지긋지긋한 얼굴을 다시 보게 될 테지. 아 지겨운 이름, 코즈메 켄마.

 

 

 

 

 

 

 

 

 

후편으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하루카 젠야'는 가상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