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Q!!/단

[테루스가] 나랑 캐치볼 해줄 사람

 

 


TERUSHIMA x SUGAWARA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던 시점조차 가물가물 해졌을 무렵이었다. 여름이 물러가며 진한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졌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날씨가 선선해지는 바람에. 그 때문에 손바닥이 근질거렸던 걸까. 이럴 때면 우린 뛰쳐나가서 캐치볼을 했었는데.

 옆집 그 애는 저번에 재수했다더라, 그래서 남들보다 1년이나 늦게 대학교에 들어갔다더라. 하고 엄마를 출처로 한 소문만 무성할 뿐.

 그 이후로 나는 남자만 만났다. 너랑 그렇게 되어버린 이후론 계속해서 남자만 만나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속이라도 좀 뒤집혀 줄까. 한편으로는 안 그랬으면 싶었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흔들리던 나의 성정체성을 엉망으로 건드렸던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캠퍼스를 거닐며 모처럼 너 같은 걸 생각했다.


 "어, 선배."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학교는 웬일이에요?"
 "그냥 잠깐 들렸어. 근처에 일도 있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과사에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학점도 좋고, 성격도 좋고, 무엇보다 잘생겨서 유명했던 사람이었다. 물론 졸업 후에는 굴지의 대기업에 곧장 입사해서 한동안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지. 아 그리고 나와 사이는 어땠더라. 세 번 정도 섹스했던 것 같기도.

 그러고 보니 섹스는 별로였다 참.

 저런 사람은 저래놓고도 멀쩡하게 회사는 잘 다닐 것이다. 대체 누가 그를 보며 남자와 난잡한 관계를 맺었을 거라고 예상이나 하겠냐는 말이다. 그런 치부는 나만이 안다. 그는 밤이 되고, 술을 마시면 전화로 나를 찾아댔다. 지겨워도 그렇게 지겨울 수가 없었는데.


 "스가 너는 이번에 졸업인가?"
 "네. 막학기예요 이번이."


 나와 선배를 번갈아 바라보는 조교의 눈빛이 의문스러워졌다. 너네가 그런 얘기를 나눌 정도로 친했어? 하는 얼굴로. 아님, 스가와라 네까짓게 쟤랑 친했었단 말이야? 정도려나.

 그럼요. 저 인간이 후배위를 좋아하는 것까지 아는데요. 와 같은 말은 당연하지만 할 수 없었다.


 "소문은 들었지?"


 하루카. 다음 달에 식 올린다던데. 뭐야. 못 들었어? 둘이 친한 줄 알았는데.

 기어이 내게 폭탄 하나를 떠안겨주고 사라진 선배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덕분에 과사를 나와 수업을 들을 때까지 계속해서 좆같은 기분을 유지할 수가 있었고. 정말이지 이렇게 고마운 일이.

 날씨는 좋았다. 하늘은 맑고 바람도 선선하니. 그래서 이런 내 기분은 날씨 탓조차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푹푹 찌거나 하면 날씨라도 탓할 텐데. 강의동에서 빠져나와 힘없이 거닐다가 보니 어느새 자취방 앞이었고, 그래서 대충 방안으로 가방만 던져놓은 채 다시 나와 가까운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러라고 술이 있는 거지, 아니면 왜 있겠어. 하고 생각하며 맥주 칸을 한바탕 휩쓸었다. 같이 먹을 과자도 몇 개 바구니에 담고, 에라 모르겠다 아이스크림도 집어 넣어버렸다.


 "2천 엔입니다."


 계산하려고 보니, 어째 알바생의 목소리가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불길했다. 그래서 지갑에서 카드를 찾는 척하며 그 얼굴을 몰래몰래 훔쳐보았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면서도 몰래몰래. 그런데, 아뿔싸. 너였다.


 "여기서 일해?"
 "아니. 오늘만 친구 대타로 잠깐."
 "아……그렇구나."


 고민하다가 아는 척을 하니, 너는 별다른 반응도 없이 카운터 너머로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반가운 것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딱히 언짢은 구석도 없이. 그래서 되려 민망해진 나만 혼자 떠들어댔다. 내 자취방이 어딘지, 정확히 어디 원룸 옆에 있는지, 일은 몇 시쯤에 끝나는지, 피곤하지 않으면 끝나고 우리 집에서 술이나 한잔 하자면서.

 물론 편의점을 나서는 순간 모조리 후회하고 말았지만.

 자취방으로 걸어가는 내내 머리를 쥐 뜯어댔다. 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억지로 떠올리려 해도 생각나지 않던 네가 오늘따라 뜬금없이 왜 그렇게 생각이 났는지. 이제 그만 너와는 끝이 났다고, 마무리 지은 줄 알았는데. 내 고교 시절을 통째로 바쳤지만, 그것도 결국 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라고.


 "진짜 왔네."
 "네가 오라며."
 "아 어. 그렇지 그렇지. 잘 왔어. 들어와."


 선배의 결혼소식을 들었고, 너를 마주쳤다. 시간은 자정이 넘었고, 날씨는 좋았고, 네가 불쑥 내 자취방 문을 두드렸다.

 방바닥에 과자를 깔고 냉장고에서 아까 사 온 캔맥주 몇 개를 꺼내 들었다. 활짝 열린 창문 밖에서는 옅게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고, 같이 섞인 심야 채널의 소리가 쾌활하게 어울렸다. 그리고 테루시마. 그저 말없이 앉아 있는 테루시마가 있었다.


 "같은 학교인 줄 몰랐어. 알았으면 연락이라도,"
 "잘 지냈어?"
 "응?"
 "그냥. 계속 궁금했거든. 나 없는 동안에도 괜찮았는지."


 보고 싶진 않았는지. 다른 사람은 만났는지. 그동안 내 생각은 좀 했는지.

 그런 말을 늘어놓은 뒤에 곧장 맥주 하나를 전부 다 들이키는 테루시마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보통, 이런 얘기는 술이 좀 들어간 다음에 하는 게 아니던가? 게다가 초장부터 본인이 그래 버리면 나는 대체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너무나도 목이 타는 바람에 나 또한 앞에 놓여있던 캔맥주를 그대로 들곤 모조리 단번에 마셔버렸다. 끝으로는 으으, 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그렇게 마신 술의 끝이 씁쓸했다.


 "유우지. 그것도 좋은데,"


 우리 조금 평범한 얘기는 어때?

 물론 나부터 평범하지는 않았더라도 말이다. 글쎄 너랑은 어땠더라. 그때 너와 나는 그냥 눈이 맞으면 섹스를 했고, 키스를 했고 같이 잠을 자고 그랬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걸 당연시 했던 시절이.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이렇게 되어버렸다. 대학생이 되고, 난 다음 해엔 사회인이 될 운명이었으므로. 그래서 우린 이런 상황을 자초하고 말았다.


 "재수했었다며."
 "응."
 "왜 연락 안 했어. 같은 학교면서."
 "몰랐어. 마주친 적 없었잖아."


 하긴. 사실 나도 몰랐었으니까. 하지만 내심 너는 어딜가나 눈에 띄는 외모고, 눈에 띄는 성격이니까 어디에 있든 널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그랬다. 붉은 실의 미담처럼. 이제 그런 믿음 같은 건 솔직히 다 소용없지만.

 깨작깨작 술을 마시면서 깨작깨작 과자를 집어 먹었다. 조용한 기류. 과거의 우린 대체 무슨 말들을 나눴을까. 대체 뭐가 그렇게 좋았고, 좋았으면 계속해서 만났을 것이지 왜 끝냈던 걸까.


 "아직도 피어싱 있어?"
 "응."
 "혀에?"
 "어."
 "봐봐."


 무심한 표정으로 길게 빼낸 그곳에는 정말 여전히 피어싱이 박혀 있었다. 하긴 징한 성격이었다. 애먼 데 피어싱을 하고, 그 다음 주엔 바로 사랑니도 뺐었으니까. 고통을 아예 느끼질 못하는 게 아닐까, 당시엔 그런 의심도 했었다.


 "애인은?"
 "없어."
 "그래?"
 "없었고."


 딱히 어떤 답을 바라고서 물어본 건 아니었는데도 막상 그렇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어울리지도 않게 순정남이라니. 난 그동안 많이도 만났는데. 너는 말로라도 아니라 하니까. 도저히 믿을 수는 없겠더라도 말이다.

 아. 기분이다.


 "밖에 나갈래?"
 "왜?"
 "나가서 그거 하자."


 캐치볼. 있잖아 캐치볼.


 "유우지 기억나? 우리 이거 틈만 나면 했잖아."


 구남자친구랑 예전에나 한번 던지고 처박아두었던 공과 글러브를 겨우 찾아냈다. 그랬던 그 남자친구는 이제 결혼소식이나 들려오고, 그 뒤로는 테루시마가 나타났다.

 근처 가로등이 켜진 공원으로 나와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테루시마는 글러브를 손에 쥐고 얼떨떨한 표정이나 지었고, 난 최대한 옛날의 그 감각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그쪽으로 몇 번이나 던졌다.


 "못 던지는 건 여전하네."
 "다 똑바로 보내고 있거든?"
 "그렇게 뻔뻔한 것도 똑같고."


 그런 식으로 말하길래 그만 웃음이 터졌다. 공을 던지다 말고 웃어버리니까 내 모습을 조금 떨어진 데서 바라보고 있던 테루시마도 웃어댔다. 이러니까 우리가 꼭 오랜 친구 같았다. 사실 그런 게 아닌데. 그것보다 더 진지했고 처절했었는데.


 "전 남자친구가 결혼한대."
 "그래서."
 "그래서 화가 났어."
 "왜 그런 남자를 만났어. 잘 좀 만나지."


 그러게. 유우지 너 없으니까 이상한 남자만 만나지더라고. 그런 마음을 담은 공을 그쪽으로 던졌다. 테루시마는 멀리까지 가서 그 공을 잡았다.


 "예전에 너 그런 말 많이 했던 거 기억나?"
 "어떤 말?"
 "네 공은 네가 잡아봐야 한다고. 아주 엉망이라고."
 "그랬었나 내가."
 "응."


 그랬었다 너는. 언제는 한 번 아주 크게 웃으면서. 내 공을 잡을 수 있는 건 아마 자기밖에 없을 거라면서. 어쩌면 그렇게 엉망진창인지 던질 때마다 웃음이 터진다고. 그때는 그저 네가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했었다.


 "우리 왜 그랬을까."
 "그러게."


 목적어도 없는 말에 너는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만감이 교차했고, 가로등 불빛이 깜박였다. 차분한 공기 속에서 말없이 너에게 공을 던졌다. 너는 받지 않았다. 그저 그 궤적을 훑을 뿐으로. 그걸로 그쳤다.

 그가 받지 않고서야 깨달았다. 내 공의 궤적은 그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음을. 난 너무 엉망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된 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어."
 "……."
 "근데 있지. 난 이렇게 엉망이 됐어 네 말처럼."


 아무나 만나고, 섹스하고, 그렇게 깨져도 그러려니. 결국엔 결혼이나 할 사람을 만나고. 당연히 나이가 들면 나는 더 나아가는 방향으로 향할 줄 알았는데, 그저 정체할 뿐이었나 봐.


 "당연히 너보다는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날 줄 알았거든. 그러면서도 헤어지는 게 두려워서 제대로 정도 못 붙이고."


 그래서 난 그게 전부 다 날 그렇게 길들인 네 잘못인 줄 알았지. 유우지. 나는 여태까지 네 탓이나 하면서 살았던 거야. 알고 있어? 그러면서도 운명이나 믿고. 난 왜 너한테 연락해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그냥 너 같은 건 저절로 찾아올 줄 알았나 봐.

 실은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는데 말이지.

 고개를 떨구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테루시마는 그저 서 있던 곳에 계속해서 서 있을 뿐이었고. 나는 이제 힘이 다 빠져서 도저히 한 발자국도 일어날 수 없었다.


 "네 말이 맞아 스가.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건 없어."


 라고 말하며 테루시마는 글러브를 벗었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와,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캐치볼을 하고 있잖아. 그건 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해?"


 드러난 내 뒷목에 키스를 했다. 키스를 하고, 웅크린 나를 끌어안고, 가로등 불빛이 깜박거렸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