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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단

[후타엔노] 여름이니까 청량한 모든 것을 숭배하자

 

 

HUTAKUCHI x ENNOSHITA

 

 

 

 어제라고 별다른 것은 전혀 없었다. 지칠 때까지 비가 쏟아졌고, 나는 늘 그랬듯이 우산은 챙기지 않았다. 후타쿠치 우산 꼭 챙겨. 반드시. 라고 핸드폰을 징징 울려대는 치카라의 메시지도 무시해가며.

 어차피 그런 당부야 무시하면 그만이었고, 치카라와는 같은 아파트에 사니까. 그리고 그는 결국 제 우산을 빌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본성을 타고났으므로.

 그래서 어제라고 해서, 어제 비가 좀 내렸다고 해서 별다를 것은 없었다. 결국, 우린 학교가 끝난 뒤 하나의 우산을 나눠썼고, 그렇게 특별할 것 없이 아파트까지 도착했다. 엔노시타의 우산, 비는 왔고, 어제는 그랬다.

 그래. 어제는 비가 내렸고, 치카라가 내게 고백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그냥. 그냥 못들은 걸로 해."
 "야,"
 "다 내 마음 편하자고 한 거니까."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나만 해."
 "그러니까,"
 "뭐?"
 "미안해."


 들고 있던 우산을 언제 어떻게 어디에 팽개쳤는지 같은 건 전혀 기억도 나질 못했다. 어디 아파트 로비에서 우린 그렇게 떠들어댔으며 난 그런 엔노시타의 젖은 팔뚝을 잡았지만, 치카라는 그만 뿌리치고 멀리 달아나고야 말았다.

 나의 젖은 손바닥, 끈적하고도 은밀한 촉감과 치카라의 뒷모습이. 그런 장면들이 집에 돌아가 눈을 감을 때까지 연속해서 반복되었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상황이던가. 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가슴이 요동쳤고, 종종 멍하니 천장을 하릴없이 바라보다가도 난 소름이 끼쳤다. 엔노시타를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좋아한다니. 아마 지금도 걔는 나를 좋아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새벽을 맞은 나는 아주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학교에 갈 테니까. 시발. 그러게 그 새끼는 왜 나한테 고백을 해선.

 학교에 가면 엔노시타를 어쩔 수 없이 마주칠 것이다. 그는 반장이고, 또 학업에 아주 충실하니까. 나처럼 양아치라면 좋았겠지만, 걔는 정말이지 쓸데없이 착실했다. 진짜, 재수 없게.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래 봤자 나였다. 치카라가 뭐 어떻게 되든, 걔 마음이 어떻든 별로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아니 생각하기도 싫다.

 교복을 억지로 억지로 꿰입은 뒤엔 머리를 손으로 마구 헤집었다. 착할 거면 끝까지 착하든가, 시발 남 걱정이나 하는 스타일이면 평생 그렇게 하지. 왜 나한테 고백을 하고 지랄이냐고. 꼴에 결국 미안하단 소리나 할 거면서!

 잔뜩 신경에 받친 채로 집을 나섰다.


 "치카라는?"
 "난들 아냐."


 반장이 뭐 대수라고, 내가 어딜 가든 애새끼들은 없는 엔노시타를 찾았다. 대체 넌 나에게 왜 그러는 걸까. 어제는 고백하더니 오늘은 학교도 나오질 않았다. 만약에 내가 널 좀 더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면 그것만은 성공적이었다. 난 어떻게든 오늘 하루만큼은 네 생각을 떨치기 힘들 테니까. 고백으로서 그리고 부재로서.

 그냥 점심은 혼자 먹었다. 일반식을 먹는 것도 어쩐지 싫어져서 그것도 대충 빵으로 때웠다. 메론빵. 맛없고 질긴 메론빵. 넌 대체 이게 뭐가 맛있다고. 이제 빵에서도 네 생각이 난다. 우유를 삼켰다.


 "엔노시타는,"
 "아 제발 저한테 치카라 얘기 좀 안 하실 수 없어요?"
 "그럼 진학상담이라도 해줘?"
 "치카라 일은 저도 몰라요. 그냥 집에서 아프거나, 죽었겠죠."


 교무실에서는 담임에게 그런 식으로 대든 대가로 반성문을 작성해야 했다. 아 이제 이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치카라가 내게 끼친 물리적인 영향 중 하나였으므로. 반성문이라니. 나는 내 잘못이 아닌 이유로 그것을 제출해본 적은 이번이 유일했다.

 마음 같아선 전화로 네게 욕이라도 전하고 싶은데, 선생 연락도 씹는다는데 나라고 아닐 리 만무했다. 게다가 걘 어제 나에게 무려 고백했다고. 절대 내 목소리 같은 건 듣고 싶지 않겠지.

 수업을 흘려들으며 조금 생각을 해보았다. 엔노시타가 가장 창피해 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나일까, 저 자신일까, 아니면 어떤 제3의 존재일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나겠지만, 아니면 이면의 자신일 수도.

 아. 둘 다려나. 그래 이게 맞겠네. 근데. 나는 또 뭐 때문에 걔 생각을 하는 거지.


 "저 조퇴시켜주세요."
 "왜."
 "아파요."
 "너라면 믿니?"
 "아뇨."
 "미쳤구나."
 "엔노시타한테 병 옮았어요."
 "오지도 않은 애한테?"
 "어제 걔랑 섹스했거든요."
 "그래 어련하겠니."
 "아 그냥 좀 해줘요."


 당연한 결과겠지만, 조퇴는 퇴짜였다. 교무실을 터덜터덜 빠져나오면서 허무한 기분을 실감했다. 치카라는 그냥 결석해도 아무런 의심 안 하면서 나는 왜. 나는 왜 저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 걸까. 난 꼭 젖은 우산처럼 그냥 툭 버려져선.

 맞다 젖은 우산. 어제 치카라의 우산은 어떻게 됐더라. 나의 눈이 번뜩였다.


 "야 켄지, 어디 가?"
 "우산 찾으러."
 "뭔 우산? 비도 안 오는데."
 "몰라 그런 게 있어."


 다음 수업 종이 울리기 전에 얼른 가방을 챙겨 학교를 달아났다. 우산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엔노시타의 우산은 엔노시타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그를 찾을 가치가 있었다. 내 것이 아니라 그의 것이었으므로. 아주 충분한 핑계가 될만했다. 어차피 엔노시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결석을 해도 선생에게 혼도 나지 않으니까. 그 우산은 그런 주인을 섬기는 물건이니까.

 엔노시타의 우산. 엔노시타는 어제 내게 고백을 했다. 비는 금방 그쳤고, 당사자는 얼굴 하나 비치지 않았지만.


 "우산 아무거나 하나 주세요."
 "죄송하지만 손님, 저희 집 우산은 어제 비 와서 다 팔렸거든요."
 "아 왜요."
 "네?"
 "씨……그럼 우비도 없어요?"


 우비는 얼마 하지도 않길래 그냥 이왕 사는 김에 두어 개를 더 챙겼다. 우산은 그냥 부모님이 어디서 가져오는 걸로 때우기로 하고. 뭐가 그리 바빴던지 뛰어오느라 흐른 땀을 대충 손으로 닦아가며 초인종을 눌러댔다.

 여름인데도 치카라는 긴소매에 긴 바지의 홈웨어를 입고 있었다. 아주 혈색도 좋고, 밥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늦은 점심이라도 먹으려 했던 모양이네. 숨을 몰아쉬며 나는 당황한 엔노시타를 노려보았다.

 놀랐겠지. 그럼 놀라고말고. 그 문 뒤로 내가 있을 줄 예상이나 했겠냐고.


 "더는 안 쪽팔리게 될 때까진 학교도 나오지 않으려고?"
 "응?"
 "진짜 사람 귀찮게 만드는 것도 재능이다 너. 치카라."
 "물……이라도 좀 마실래?"


 기껏해서 묻는다는 게 물이라니. 순간 떠오르는 비속어가 여러 개였지만 그저 내뱉거나 그럴 힘도 없었으므로 난 그를 그대로 지나쳐 식탁 앞에 앉았다.

 점심으로 먹은 게 겨우 메론빵이었고 정말 맛도 드럽게 없어서. 그래서 난 그가 준비했을 식사를 야금야금 먼저 해치워버렸다. 어차피 저 새끼는 남이 어찌 됐든 저 자신은 절대 안 굶을 테니까. 그래 저 얼굴 좀 봐, 멀쩡한 것 좀 보라고.

 대체 저 얼굴이 어떻게, 나한테 고백씩이나 한 얼굴이냔 말이다. 반질반질 해서. 좋은 냄새나 나고 말이지. 시발 진짜 재수 없게.


 "과일 먹을래?"
 "너 나 좋아하잖아."


 식사 뒤엔 욕실에서 가글을 세 번이나 했다. 음식 앞에 금방 목적성을 잃어버린 나에게 감탄하면서. 그리고 그런 나를 그저 바라만 본 엔노시타를 질타하면서.

 치카라가 밥 먹는 것을 기다리며 그의 방을 구경하고 있던 참이었다. 정돈된 책상과 침구. 늘 구김 없는 그의 교복 차림처럼. 갑작스레 내게 고백을 해야 했을 그를 떠올렸다. 방금까지 정성 들여 정리해놓은 책장을 모두 뒤엎는 느낌이었을까. 엔노시타는 감정에 못 이겨 좌절했을까.

 그래서 나는 흔들리는 치카라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나를 좋아하는 치카라를.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던 치카라를.


 "야.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그렇게 말해버리면,"
 "너 진짜 날 좋아하는 게 맞기는 해?"
 "……맞아."
 "그럼 너 나랑 섹스할 수 있어?"
 "어?"
 "남자들끼리 하는 거. 나하고 할 수 있냐고."


 엔노시타는 조금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이런 내 모습은 익숙했겠지만 이런 대사는 낯설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건 나도 낯설고, 어제부터 나를 좋아하는 엔노시타도 낯설었다. 만약에 둘 중 누군가가 뺨을 맞아야 한다면 치카라일 것이다. 그는 모든 감각에서 먼저 날 당황케 하였으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연히 주춤댈 거라 생각했다. 수치스러워하고, 어쩌면 내게 욕을 퍼부어도 모자라지 않겠지. 하지만 치카라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죽을 수도 있어."
 "뭐?"
 "그만큼 네가 좋아. 미안해."


 몸은 사시나무 떨 듯하면서도, 말 한 마디 한 마디 모두 울먹이고 말면서도. 치카라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이건 내 유일한 진심이고 이것만은 네가 어떻게든 왜곡할 수 없어. 라고 덧붙여 얘기하는 것처럼.

 젖은 것을 껴안는 것은 꺼려지기 마련이다. 특히나 이미 나는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 있다면 더욱이. 그래서 젖은 것을 가까이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상황에 개입해 나도 함께 젖겠다는 걸 동의하는 순서.

 하지만 비가 왔다. 어제는 비가 왔고, 젖은 우산은 버려지고, 엔노시타는 나를 좋아했다. 엔노시타가 어제 내게 고백을 했다고 해서 그가 나를 어제부터 좋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 뭐 이유야 무엇이든 난 젖은 걸 말릴 재주는 없었다. 아.

 스며들었다. 오늘 그래서 적셔졌다.

 

 

 

 

 

 


제목은 뭔가 라노벨 느낌으로!